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와르 사다트 (문단 편집) === 대통령 집권 === 나세르와 달리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추구했던 사다트는 집권 이후 반대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가말 압델 나세르|나세르]]의 사회주의식 국유화 정책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사다트는 [[이집트]]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슬람적 관습들을 없애는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1973년 10월에는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동서 양쪽 전선으로 기습, 선제공격을 가하여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파일:external/flashbak.com/2920443.jpg|width=100%]]||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지휘실의 사다트. 왼쪽이 수에즈 운하 강습도하작전을 주도한 참모총장 사드 압드 엘 샤즐리 장군이다.|| 개전 초 [[이집트군]]은 적시에 동원령을 발효하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군]]을 거세세 몰아붙이며 중동전 사상 최초로 아랍 측이 세계에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만한 군사적 성과를 거뒀지만,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자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수에즈 남단의 제3군이 포위당한 채 전쟁을 끝마쳤다. 그러나 번번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하기만 했던 이집트와 아랍 진영에게는 이 정도의 분전도 충분히 의미있는 군사적 성공이었고, 덕분에 사다트는 이집트와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무엇보다, 전쟁이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로 종결됐다고 해서 사다트의 계획도 함께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한 노림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미 개전 전부터 이집트의 후견국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내던 그는 1974년 1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새라 개입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중재 하에 이뤄진 전후 협상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 동안에서 물러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67년 이후 거의 10년 만에 이집트 최대의 수입원 중 하나던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대가로 미국의 대규모 지원 패키지를 얻었고, 미국은 사다트에게서 친미 노선으로의 전환을 확인받으며 이집트라는 아랍 세계 최고의 외교적 카드를 손에 넣었다. 소련만 제외하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딜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dat_and_Begin_(cropped)_-_USNWR.jpg|width=500]]||[[파일:external/news.bbcimg.co.uk/_61203209_ap7711200241.jpg|width=300]]|| ||1977년 이스라엘 방문 당시의 모습. 오른쪽은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국무총리||이스라엘 국회에서 연설 직후|| 탄력을 받은 사다트는 이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밀고 나갔다. 1977년에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의 본회의장에서 연설했다. 연설문의 핵심은 명료했다. "앞으로 전쟁은 없습니다!" 이집트 대통령이 불과 4년 전 각자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였던 적국의 수도를 미소띤 채 방문하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사다트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도 서로 속내를 기탄없이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훗날 사다트에 대해 전 세계 정상 중 유일하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정을 느낀 진정한 친우였다고 회상한 카터는 사다트와 베긴을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양국간의 항구적인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밀고 당기는 팽팽한 협상 끝에 마침내 두 나라는 역사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바로 1978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점령했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고, 이집트는 그 대신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승인하고 평화협정을 맺은 후 국교를 수립하기로 했다. 세계가 놀란 이 합의로 사다트는 메나헴 베긴과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파일:external/www.martinkramer.org/SadatCarterBegin325__325x244.jpg|width=100%]]|| ||왼쪽부터 사다트, [[지미 카터]],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3차 중동전의 굴욕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던 4차 중동전 이전까지는 아랍 국가에서 이스라엘과 이런 협정을 맺는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자살행위였겠지만, 사다트는 욤 키푸르 전쟁에서 놀랄만한 군사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이것이 패자로서 굴복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대의를 내세울 수 있었다. 실제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후 수십년 간 살아남아 이집트-이스라엘 관계의 기반이 됨으로써 그 견고함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아랍 진영 내부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위시한 동포들을 저버렸다는 혹독한 비판이 터져나왔다. 불과 몇년 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승리한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이집트 국내의 강경 [[이슬람주의|이슬람주의자]]들도 사다트에게 등을 돌렸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자유화를 통한 외국 자본의 도입도 사다트 정부가 경제에서 무능한 바람에 오히려 이집트 사회의 빈부격차 심화, 부정부패의 만연으로 이어지면서 사다트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9년 1월 [[이란]]에서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가 전복되자 사다트와 친했던 [[팔라비 2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그 후 [[바레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이 과정에 사다트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슬람 사회에서 사다트가 무슬림들의 편이 아니라며 사다트에 대한 비난여론이 높아졌다. 그렇게 아랍 국가들과 사다트 반대파의 반발이 높아지던 중, 사다트는 1981년 9월 이집트의 나세르 지지자, 지식인, 여성운동가, 공산주의자, 이슬람 원리주의파, 학생운동가, 대학교수, 언론인, 정치운동가들을 급작스럽게 체포하여 독재자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약 1,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이집트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그 사이에 [[오일 쇼크]][* 이집트도 석유가 나오기는 많이 나오지만 이집트의 인구가 많은 데다가 석유의 품질이 좋지 않고 정제할 기술력도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수입해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오일 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걸프 만 국가들과 [[알제리]], [[리비아]] 등은 엄청난 이득을 봤는데 비해 이집트는 별로 이득을 보지 못하였다.]와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이집트 경제가 나빠지기까지 하자 사다트의 지지율은 갈수록 하락세를 걸었다. 한편 이러한 사다트의 이스라엘과의 화평 노선은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여러 아랍 세계 국가들에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승인하자 아랍 국가들은 1979년 [[아랍연맹]]에서 이집트를 추방시키고(1989년에 복귀) 이집트에 소재하고 있던 아랍연맹 본부를 [[튀니지]]로 이전해 버리면서[* 이집트가 다시 가입하면서 현재는 [[카이로]]로 돌아왔다.] 같은 아랍 국가들로부터도 따돌림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스라엘과의 화해 노선으로 반 이스라엘 노선을 추구하던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아랍연맹에서 추방당한 이후 사다트 정권 말기에서 [[무바라크]] 정권 초기였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까지 이집트에 우호적이었거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국가라고는 같은 언어와 민족, 종교를 공유하는 아랍 국가들이 아닌 [[모잠비크]][* 이집트는 나세르, 사다트 정권 시절이던 1960, 70년대에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포르투갈군과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잠비크를 지원했다.]나 [[탄자니아]], [[잠비아]], [[콩고 인민 공화국]], [[르완다]], [[카메룬]], [[케냐]], [[자이르]], [[우간다]] 같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뿐이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 및 이스라엘에 대한 정식 국가 승인으로 중동 및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따돌림당하자 우호적인 제 3세력을 만들고자 1980년대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행하는 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의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수립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전쟁할 일이 없어지게 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소총이나 기관총, 폭탄, 군모와 군복, 헬멧 같은 무기들과 군수물자들을 여러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나라들에게까지 대거 팔아넘겼는데 이후 이집트에서 팔아넘긴 이 무기들을 아프리카 내전 국가들의 반군과 정부군, 민병대 세력들이 전쟁터에 투입해 총탄과 포탄을 퍼붓고 살상하며 죽이는 일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